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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 대한민국 볼거리 먹거리/Jeju | 제주도
제주, 말목장에 눈이 내리면
2017. 2. 17. 22:47

초록 잔디위에 흩날리던 눈 그리고 말
봄과 겨울 사이

 

목장 귀요미 총집합 영상

 

이번 겨울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딱 두번 눈다운 눈이 왔다.

집 창밖으로는 겨우내 푸른 목초가 싱그럽게 자라서 겨울임을 잘 느끼지 못했는데, 그 싱그러운 푸른 잔디 위로 새하얀 눈발이 흩날린 날이 있었다. 두 계절을 함께 보는 듯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제주 말목장의 겨울.

 

 

 

 

 

우리집 창밖에 홀로 서계신 성모 마리아 상이 이날은 조금 추워 보였다.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는 드레스 차림으로 소복히 내리는 눈을 그대로 다 맞으며 물끄러미 땅으로 떨어지는 눈구경을 하고 계셨다. 나도 원고를 들고 씨름하다가 세차게 흩날리는 눈발에 집중력을 빼았겼다. 

 

싱그러운 초록 잔디 위로 눈이 쌓이는 신선한(?) 경험

 

미친무당 바람.

나는 제주의 바람의 그렇게 불렀다. 산들바람, 하늬바람하는 것 처럼 바람에 이름을 붙였는데, 다른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방향성도 없이 사방으로 휘돌아 치는 정신 없고, 무섭도록 쎈 제주의 바람은 늘 무아지경에 빠린 무당의 칼춤을 생각나게 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서 함박눈은 소리없이 아래로 떨어지기만 했는데, 제주에서는 휘오오오하는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아래서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온 마당을 몇바퀴씩 휘돈다음에야 겨우겨우 땅위로 내려왔다.  함박눈이라는 표현도 어색하게 땅위로 내려올 때 즈음 눈송이는 이미 산산히 부서져 제대로 쌓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말들은 이런 눈보라 몰아치는 날에 뭘 하고 있을까?

 

 

문득 말들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 졌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까지 오는데 밖에 사는 말들은 괜찮을까. 사방에서 나무들이 부러질 듯 흔들리는 숲속에서 무서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말들이 모여있는 방목장에 가보고 나서 나의 걱정은 한참 배부를 때 누가 넘겨준 가래떡 한덩이 만큼이나 쓸모없는 것임이었음을 깨달았다.

말들은 두려워 하기는 커녕 마치 눈과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쳐묵쳐묵하는데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과 내가 다른 공간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강풍에 다리가 다 휘청일 지경이었는데, 녀석들은 우직하게 서서 겨울 들풀의 씨를 말리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듯 열심히 바닥을 훑고 있었다. 말들이 힘이 세긴 센 모양이다. 다리가 휘청은 커녕 털끝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 말은 왜 건초더미까지 나와있지? 여기는 방목장 울타리 밖인데...

다른 말들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 두마리만 호사스럽게 엄청난 양의 건초더미를 축내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가자 녀석이 내 눈치를 슬금 보더니 신나게 건초를 먹는다. 아마 눈보라에 방목장 철조망 어딘가가 뚫려 두녀석이 나온 모양인데, 딱히 멀리 가지 않고, 열심히 먹는데만 집중하고 있어 주인 아저씨께 보고 하기 전에 일단 사진을 좀 찍기로 했다. 

 

동물들은 어쩌면 눈이 이렇게 맑을까. 커다랗고 선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엄마미소가 피어오른다.

 

 

...

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삐딱하게 입에 건초를 물고, 나를 반항기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네. 껌좀 씹는 녀석인가...

 

 

요 흰말과 갈색말은 늘 둘이 꼭 붙어다니는데, 이번에도 같이 탈출을 했다. 오래전에 산속에서도 한번 마주친 녀석들인 것 같은데, 도망치는데 귀재인 듯. 근데, 딱히 멀리 가지 않고, 늘 방목장 주변에서 풀을 뜯고 있다 걸린다. ^^; 

근데, 밥먹는 말 입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도 또 처음이다. 말은 입술을 사람의 손이나 코끼리 코처럼 사용하는 모양이다. 유연하고 커다란 입술을 주욱 뻗어 멀리 있는 풀을 끌어오기도 하고, 궁금한 사람 옷을 잡아 당겨 보기도 한다. 

 

울타리 안쪽의 말들이 거대한 건초더미를 독차지한 녀석이 부러운 듯 웅성거리고 있다. 쟤 뭐야? 어떻게 간거야, 저기?

 

사실 커다란 말이 점프하면 울타리 따위야 가볍게 넘으련만 온순한 말들은 애초에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앞이 막히면 조금 기웃거리다가 금새 포기하고 다른쪽 풀을 찾아 돌아 선다. 이녀석이 제일 부러워 하며 울타리 주변을 서성거렸는데, 애꿎은 내 카메라만 몇번 핥아보고는 포기하고 뒤돌아 선다.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먹어야 해! 

 

갈기에 붙은 눈을 찍으니 신경쓰였는지 뒷눈길로 힐끔거리면서도 1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먹는다. 그대로 두면 산더미 같은 겨울 양식을 둘이서 다 먹어치울 기세. 마침 아주머니가 외출중이시기에 얘들을 일부러 풀어 두셨냐고 여쭤봤더니 전혀 아니라고 하신다. ^^; 탈출한 것이 맞음.

녀석들은 결국 나의 보고로 주인 아저씨에게 이끌려 방목장 안으로 돌아갔다. 원망하지 말렴. 몸매 관리 해야지 얘들아. 두마리가 나와도 울타리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기가 쉬운데, 한마리만 데려가면 같이 다니는 말은 자동으로 졸졸 따라오기 때문이다.

 

 

 

 

방목장 안의 말 두마리가 서로 얼굴을 물어가며 놀고 있다. 싸우는 건지 노는 건지 애매한...

 

다들 초연한데, 한달전에 태어난 망아지 키키만 두리번 거리며 엄마에게 몸을 딱 밀착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하얀 눈. 대체 이게 뭔가 싶은 모양이다. 아직 다리의 힘이 완전하지 않아서 다른 말보다 거센 바람에 조금 휘청이기도 하고, 눈발을 멍하니 쳐다보기도 하며 생에 첫눈을 보고있는 키키를 보니 나도 함께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첫 눈을 봤을 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가. 기억나지 않는 내 인생의 첫눈. 아마 나도 키키처럼 어리둥절 했겠지.

말들은 보통 봄에 태어난다는데, 키키는 겨울에 나와서 거친 제주의 겨울을 잘 이겨낼까 걱정이었건만, 아주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요즘엔 벌써 엄마 먹는 건초도 한번씩 물어 보며 이유식을 시작했다. 말이 태어나는 날 부터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니, 어디서 또 이런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김녕 목장에서의 세달은 제주에서 보낸 열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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