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말목장에서 한달살기

제주 하면 떠오르는 바다, 한라산, 현무암, 오름, 바람, 해녀, 귤 그리고 말! 말! 말!

아직 마당이 푸르렀던 10월의 어느날 이곳으로 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전국일주 이야기. 표면적으로는 여행한다고 돌아다니는 건데, 웬 일이 이렇게 쌓이는지 여행기 전할 시간도 없다. 써주는 곳이 있어 바쁘면 좋은 것인데, 외장하드에 쌓이는 사진들을 보면 일 좀 접어 두고, 빨리 다 포스팅을 하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스트레스도 풀 겸 재밌자고 하는 블로근데, 쓸 시간이 없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니, 이거 아이러니 하네. 


어쨌든 우리는 여전히 제주에 살고 있다. 6월에 곽지해변에서 멀지않은 귀덕마을을 시작으로 논짓물근처 예래마을, 제주 바다의 대표주자 협재 해수욕장이 있는 협재마을을 거쳐 지금은 믿기지 않는 푸른 빛깔의 김녕해변 근처 말목장에 머물고 있다.


창밖에는 그런 우리를 성모마리아님이 온화하게 지켜보고 계신다. 집안에 벌레 안들어 오게 지켜 주소서! 


목장이라니, 지난 번 예래마을의 낡은 농가주택에서 그렇게 지네를 비롯해 각종 벌레에 시달리고 웬 객기로 또 농장으로 왔을까? 사실 심장을 콩닥이며 왔는데, 다행히 이 집은 목장주인 아저씨가 직접 지으신 것으로 꼼꼼하게 마무리를 하신 모양이다. 처음 이사왔을 때 개미가 좀 있었는데, 약 좀 붙여놨더니 싹 사라지고는 그 뒤로 벌레프리 하우스가 되었다. 땡큐 갓 소리가 절로 나온다. 또 지네약 뿌리면서 살아야 할까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지네 이야기를 모르신다면 제주살이 세달째 그간 느낀 장점과 단점 



예전 집들은 전부 바다가 보였었는데, 이곳은 조금 색다른 것들이 보인다.

예를 들면 뒷마당으로 가끔 알록 달록한 장끼가 뛰어 다닌다. 녀석, 어찌나 곱고 이쁜지.



유난히 색이 곱고 훈남이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꿩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모양. 가끔은 와이프 여섯을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전생에 숲을 구한 장낀가 어찌 이쁘장한 까투리를 여섯이나 거느리고...ㅋ


제주에는 꿩이 참 많다. 숲을 삼십분 산책하면 어김없이 4-5마리 정도를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꿩은 놀라 도망갈 때 얼마나 요란하게 꽥꽥거리고 퍼드득 거리는지 조용한 숲을 감상하다 심장마비 올 뻔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숲에 있던 꿩이 날아 오르면 오이군도 나도 같이 놀라서 막 각자 언어로 놀란 꿩처럼 된소리를 내뱉게 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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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을 상자에 넣어 놓으면 금새 물러서 저리 놨더니 오이군이 부엌에 오면 귤이 열맞춰 있다가 공격할 것 같다고 요리를 안하는 부작용이...


그 꿩이 노는 뒷마당은 원래 말을 먹이기 위한 초지로 가끔 주인아저씨가 이렇게 말을 메어 놓으시기도 한다. 그럼 주방이 어찌나 멋드러 진지. 서귀포 농장에서 따온 황금향을 우물우물 씹으며 말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제주살이의 로망이 200% 실현된 느낌이 든다.


숫말들을 한울타리에 두면 싸워서 이렇게 혼자 묶어 둔다고. 말은 잠도 거의 안자는데 하루종일 참 심심하겠다


한번은 이 부엌 창문 앞에 돌담 위로 족제비 한마리가 뽀르르 달려간 적도 있다. 나는 족제비를 본 적이 없어서 갈색 청설모인 줄 알았건만 한라산 생태관에 가니까 그녀석 박제가 있었고(-_-;) 고것이 족제비라 하더라. 



그리고 드물게 옆집 흑염소 농장에서 탈출한 엄마 염소가 아기 염소들을 데리고, 놀러 오기도 한다. 자기네 집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는지 맨날 말 초지에 와서 아이들을 먹이다 사진 좀 찍으려면 혼비백산 도망간다. 어찌나 예민한지. 가까이 갈 수가 없어서 줌으로 당겨찍고, 크롭한 것. 

근데, 쟤네 전부 약으로 쓰일 애들이겠지. 저렇게 귀여운데...ㅠ_ㅠ



손재주 좋은 목장주인 아저씨는 혼자서 현재 살고계신 집도 직접 지으셨고, 우리가 사는 별채도 직접 지으셨단다. 마당도 그냥 내버려 둔 듯 하면서 은근히 구석구석 센스 있게 장식을 해 놓으셨다. 이렇게 어항같은 것도 돌담위에 얹어 놓아 산속에 있어도 바다가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근데, 이거 어부들이 쓰는 것 같은데, 뭐에다 쓰는 물건인고...



주인 아저씨는 말 목장을 운영하시면서 여름철엔 대학에서 요트 강의도 하신다. 그래서인지 나무 아래는 배를 젖는 노가 툭 놓여 있다. 

제주는 12월 중순까지 워낙 따뜻했기 때문에 겨울에도 웻 수트 입으면 요트 탈 수 있지 않나요? 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못한다고 한다. 12월 중순에도 해가 나는 날이면 오이군은 수영을 가고 싶다 할 만큼 따뜻해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건만, 딱 크리스마스 즈음 되자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끝도 없이 흐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라는 표현은 약하고, 거의 매일 밤 태풍급의 강풍이 휘몰아 친다는. 가끔 집 근처에 강풍에 휩쓸린 참새들이 죽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ㅠ_ㅠ 서울에서 이랬으면 태풍이라며 호들갑 떨었을텐데, 이곳에서는 이게 일상이다. 밤에는 그 바람이 더 세져서 창밖으로 굵은 소나무가 부러질 듯 휘청거리는 것이 보인다. 삼다도라더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구나.


 맛난 밥두고 표정이 왜 이럼? 지못미...


그래도 11월 말까지도 마당의 단풍나무가 색도 바래지 않은 채 잎이 다 달려 있어서, 햇살 좋은 날이면 가벼운 차림으로 마당에서 밥을 먹곤 했었다. 



밥은 간단하게, 샤브샤브. 

샤브샤브 이름이 거창하니 그냥 야채랑 샤브샤브용 고기, 버섯 넣고, 가쯔오 국물에 익힌 국 정도 되시겠다. 



밥 먹고나면 집 앞 평상에서 초미니 목장견 일순이랑 데굴거리며 소화를 시켰다. 이녀석 여름철에 털밀면서 일년에 딱 한번 목욕한다는데, 풀어주면 와서 안기고 부비고 난리난리. 

일순이는 화이트 포메라니안으로 보통 집안에서 키우는 개인데, 여기서는 어쩌다보니 목장견이 되어서 집 입구를 지킨다. 



작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집도 잘 지키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오가는 이를 반겨서 목장 리셉셔니스트로 제 몫을 톡톡히 하는 녀석이다. ^^ 



게다가 어찌나 애교스러운지. 그냥 눈만 마주쳐도 같이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사갈 때 나도 모르게 요녀석을 홀딱 집어갈까 두렵다. ^^;


난 얌전하고, 착한 개예요. 이리 와 쓰다듬어 주세요 ^^ 요 덫에 걸리면 청바지에 구멍이 나고, 옷 소매가 찢어지도록 녀석에게 사랑을 받는다 ^^;


마당에는 일순이 외에도 천방지축 골든리트리버 청운이와 무서운 외모와 달리 애교스러운 벤이 있었다.


까불지 않고, 엘레강스하게 앞만보고 다니는 벤. 애교도 기품있게 다리에 머리 한번 부비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골든리트리버인 청운이는 저렇게 얌전한척 앉아 있다가  쓰다듬어 줄라치면 사방으로 뛰어오르며 까불어서 그야말로 온주변을 개판으로 만드는 개구장이 녀석이고, 그레이하운드인 벤은 완전 반대로 사람이 멀리 있으면 정신없이 달려다니다가 막상 가까이 가면 얌전하게 앉아 부비적 거리는 애교쟁이였다.



  노랗게 귤이 익는 목장 주변 산책

산에서 불쑥 야생마 만난 적 있으세요?

초지 위에 데려다 놓으면 화보삘나는 일순이의 외모


우리는 낮에 녀석들을 번갈아 데리고 다니며 숲을 산책을 한다.

근처에 오름도 가고 싶고, 바다도 가야하는데, 밖에만 나가면 애절한 눈빛으로 우릴 부르는 녀석들의 기대를 져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집에 온 뒤로 제주 풍경은 많이 보질 못했고, 동네 숲 산책만 열심히 하고 있다.



시골개들은 아주 짧은 줄에 묶여 집앞에 메인채로 일생을 보낸다. 사람이 오면 컹컹 짖고, 반가움을 표시해 보지만 시골에서 개들의 입지란 그냥 도둑지키는 방범용 알람정도. 아무도 그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시골개라 더 자유롭고, 들판을 달릴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나라 시골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전국일주를 시작하며 시골 어딜가도 개를 참 많이 키운다는 것을 알았고, 응당 그들이 받아야할 애정표현이나 산책 등을 받으며 사는 경우는 극소수에 가까우며, 복날 두들겨 맞고 식탁위의 이슬로 사라지지나 않으면 그나마 호강한다는 소리를 듣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슬프지만 사실이 그랬다.


 제주의 가을 & 겨울 산책. 붉은 단풍과 하얀 눈대신 푸른 들판과 노오랗게 익어가는 귤들이 싱그럽게 우릴 반겼다


다행히 이 집은 아저씨가 말을 자유롭게 방목하시는 분이라 녀석들도 그렇게 짧은 줄에 묶어 놓지는 않으셨다. 밭이나 농장 한가운데서 짖으라며 홀로 메이지도 않았으며, 꽤 튼튼한 집도 있어서 시골개치고 비교적 컨디션이 좋은 편이다. 그렇지만 바쁜 농장일에 느긋하게 개를 산책시킬 시간도 없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녀석들을 데리고 동네 구경을 시켜주시 시작했다. 


작은 일순이는 얼마전부터 아저씨가 한달살기 렌트를 시작하고, 우리같이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가끔 데리고 나가 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손에 익숙하고, 부르면 잽싸게 달려와 착하고 누워 배를 쓰다듬으라 한다.


골든리트리버 청운이는 아저씨가 가뭄에 콩나듯 풀어주시는 모양이다. 육중한 몸으로 사방으로 뛰어 올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도 지 이름 부르면 쏜살같이 되돌아 온다. 비록 온몸으로 부딛히며 다가와 내 다리가 부러질 지경이었지만 아무리 멀리서 불러도 어김없이 돌아온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레이하운드 벤만은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애교스럽건만 한번 풀어주면 절대 되돌아 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번도 산책을 다녀본 일이 없다는 사냥개 벤. 두어번 풀어줬다가 녀석잡으러 뛰느라 산책이 하드코어 트레이닝이 된 적이 있었다. 근데, 또 우스운 건 지 집앞에 메어놨던 목줄이 끊어진 적이 있는데, 밤새 온동네를 헤짚고 다니다 다음날 슬그머니 돌아오더란. 어쨌든 줄이 풀리면 근처 흑염소 농장이나 개농장(ㄷㄷ 근처에 개농장이 있었다 ㅠ_ㅠ)에 가서 동물들을 몰고 다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싫어해서 산책할 때 이녀석만은 목줄을 풀어줄 수가 없었다. 



햇살 좋은 어느날도 동네 숲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청운이는 줄을 풀고, 벤은 목줄을 메고.

그런데, 햇살속에서 우아한 자태가 등장했다. 말 한마리가 햇살을 등뒤로 받으며 숲속에서 걸어나오는데, 어찌나 신비롭고 우아하던지 유니콘 만난 줄.



근데, 왜 여기 말이 있지? 우리나라에 정말 야생마가 있을리는 없고 말들은 방목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울타리 안쪽 숲속에 있는게 맞는데, 얘들은 산속에 길에 있네. 

혹시나 해서 주인아저씨께 전화를 드렸더니 탈출한 것이 맞다며 곧 데릴러 오겠다고 하셨다.


말들과 개들과 노닥노닥 아저씨를 기다리는데, 목장에 사는 개지만 가까이서 말이랑 놀 기회가 없었던 청운이가 촐싹 촐싹 하얀말에게로 다가 갔다. 그러자 뒤에서 그걸 본 갈색 말이 깜짝 놀라더니 막 달려가 청운이를 가차없이 네 다리 사이에 넣고 막 꾹꾹 밟는게 아닌가. 아마 청운이가 하얀 말을 공격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형제도 아니고 그냥 친해서 같이 다니는 말이라는데, 그렇게 까지 전력을 다해 서로 지켜 줄 줄이야. 말들의 우정이 감동인 동시에 청운이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먼지같이 쪼그라 들었었다. 다행히 청운이는 워낙 등치가 좋고, 비계도 많은 녀석이라 쿠션이 되어 주었는지 잠시 납작 엎드려 쫄아있더니 그새 촐싹맞게 돌아다닌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말을 보면 저어~쪽으로 멀리 돌아 간다는 ^^;;

사람에게는 참 순딩한 말들인데, 화나게 하면 더없이 용감해진다.



아저씨가 작은 트럭을 타고 오셨다. 보통 빵빵거려 말을 몰고 가신다는데, 이날은 말이 잘 안따라와서 아저씨가 말을 끌고, 오이군이 트럭을 몰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 개 두마리는 고스란히 나의 몫. 어휴...힘세고, 사방으로 날뛰는 청운이까지 혼자서 끌고 오려니 어찌나 감당이 안되던지. 게다가 사람과 말이 함께 행진하니 신이난 벤이 자꾸 뛰는 바람에 내가 개들을 산책시킨 것이 아니라 개들이 나를 강제 트레이닝 시키며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저씨는 TV동물농장 같다며 껄껄 웃으셨고 ^^;

개때문에 뛰느라고 힘은 들었지만 정말 제주도가 아니라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말과 친해지는 방법

단체 미용 서비스


탈출을 하지 않으면(^^;) 말들은 보통 이렇게 공터에 모여 있다가 심심하면 뒷쪽 숲속에가서 풀이나 나무껍질을 뜯어 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말은 평균적으로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않아서 우리보다 하루가 길다. 밤에도 말이 잠을 자지 않는다는 사실은 예전에 스위스에서 마차여행을 했을때 알게 되었는데, 정말 얘네들도 밤새 토닥토닥 걸어다니고 히히힝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참고글  마차타고 스위스 1박 2일 여행 



숲에서 신나게 놀다온 녀석들은 딱 표가 나는데, 앞머리에 도꼬마리를 잔뜩 붙이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 아무리 빗으로 빗겨주고, 저걸 다 떼어줘도 하루만 지나면 다시 도꼬마리 씨앗을 잔뜩 붙이고 돌아온다.


말은 보통 옆으로 드러누워 자지만 가끔 저렇게 엎드려서 턱을 땅에 고인 채 자는애도 있다. 자고 깨면 입 저릴 듯 ^^;;


처음엔 구경만 했는데, 가서 빗질을 해주면 말들이 무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빗은 이렇게 생겨서 털에 붙은 흙을 떼어 줄 때 쓴다


말들이 빗질을 해주면 얼마나 좋아 하는지 정말 10-20분을 꼼짝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 단, 말과 놀때 주의할 것은 절대 말 뒤로 가지 않는 다는 것. 초식동물인 말은 뒤에 무언가 나타나면 보호본능에 의해 무의식 중에 뒷발질을 할 수가 있다. 근데, 뒷발길이 얼마나 센지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지고, 심장에 맞으면 치명상이 될수도 있다고 한다. 꼭 누가 오는지 알게 하기 위해 앞이나 옆에서 다가간다.

그리고 여기 저기를 쓰다듬어 봤는데, 개와 달리 턱 아랫쪽을 쓰다듬어 주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볼이나 목, 등, 콧등을 긁어주니 가만히 있더라. 그리고 사람 손보다 빗질을 좋아하는데, 얼마나 좋아하냐면, 열심히 빗질을 해주다 다른 녀석에게 가기라도 하면...



이렇게 악착같이 쫓아와 계속 자기를 빗겨달라며 들이댄다. 그럼 다른녀석이 와서 얘를 몰아내고 본인을 빗겨달라고 옆구리를 불쑥 들이민다. 가끔 막 뛰어다니며 서로 빗기라고 싸워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수 있으니 주의한다. ^^;;


빗질 말고도 익히 듣던대로 말은 당근을 좋아한다. 가끔 커다란 당근을 사서 주면 그 단단한 당근을 두부 먹듯이 부드럽게 먹어치워버리더라. 손가락 조심.



  안녕, 벤!

예상치 못한 이별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이 말목장에도 찾아 왔다. 12월 말쯤 되자 가지에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강풍이 휘몰아 치는 날이 부쩍 늘었다. 1월에도 제주는 영하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엄청난 바람이 싸대기를 계속 때려대는 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를 훨씬 밑돌았다.



그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요녀석, 벤이었다.

일순이는 엄청나게 북슬북슬한 털이 있어서 바람이 엄청난 날에도 아무일 없는 듯 밖에서 느긋하게 잠을 잔다. 퉁퉁하니 비계가 있는 청운이도 이딴 겨울 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밖에서 유유자적 먼산을 바라본다. 그런데, 털도, 비계도 없는 벤만은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끊임없이 왔다갔다해서 같이 먹여도 살이 전혀 찌지 않는다는 벤. 하도 움직여서 정신없었던 태풍, 볼라벤에서 이름을 따와 이름도 벤이 되었다는 녀석인데, 겨울이 되고부터는 통 집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청운이는 평소에 저러고 앉아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몸매가 투실투실...남일 같지가 않구나 -_-;



그래서 벤네 집에는 차에서 쓰던 무릎담요 세장을 넣어 주었다. 주인아저씨도 겨울에 따뜻한 뭔갈 넣어 주신다는데, 마침 안쓰는 것들이라 넣어줬다. 해가 나는 날이면 녀석이 무릎담요를 밖으로 끌고 나와 그 위에 앉아 햇살을 쬐며 잘 사용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딴 무릎담요따위는 제주의 미친 칼바람을 막기에는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녀석 집에 비닐 뾱뾱이라도 둘러 줘야 하는데...생각은 있었지만 우리집 개도 아닌데, 내맘대로 하기도 뭐하고, 오래 살 곳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열정을 보이지는 못했던것 같다. 그리고 어느날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낮에 청운이랑 벤을 데리고 숲속을 산책을 했다. 추워서 집밖에도 나오지 않던 녀석이 산책 줄만 가져오면 덜덜 떨면서도 바람같이 달려와서 나갈 준비를 했다. 말들이 풀을 뜯는 산속을 같이 돌아 다닐때면 그렇게 씩씩하고 용맹스러울 수가 없다. 1m가 넘는 높은 돌담도 가볍게 뛰어 올라 넘어 나를 놀래키며 벤은 그렇게 즐겁게 산책을 했다.


다음날 아침 벤이 집 앞에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이 따뜻한 날이어서 일광욕을 하나보다 했다. 그런데, 햇살 아래가 아니라 응달아래 누워있다. 이상했지만 일을 하느라 바빠서 갸웃하고 말았다. 잠시 후 방학이라 말을 타러 온 아이들이 주변을 돌아다닌다. 같이 놀자고 뛰어다녀야 할 벤이 그대로 누워만 있다. 좀 이상해서 오이군을 내보냈다. 오이군이 가까이 가면 까불 까불 뛰어야할 녀석이 그냥 누워 있다. 오이군이 미소 없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다 본다. 나도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주인 아저씨가 뒷뜰에 포크레인으로 작은 구덩이를 파고, 녀석을 종이 봉투에 담에 흙을 덮어 주었다. 잔디도 덮어 주었다.

어제의 산책이 그녀석의 마지막 산책이었다.


아저씨가 지난 저녁에 준 밥까지 싹 다 먹었는데, 왜 한밤중에 밖에 나왔던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집 밖에 나왔다가 어떤 이유로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 같다. 차가운 바닥에 누운채로 그냥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듯 했다. 개들은 떠날 때 눈을 감지 않아서 공허한 녀석의 초록빛 눈이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너무 가여워서 쪼그리고 앉아 녀석의 머리를, 감지 못한 눈을 쓰다듬어 주었다. 늘 풀어주고 싶었던 그녀석의 꽉 조인 목줄을 그제서야 풀어주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났다. 


까비가 떠나서 결심한 이 여행 중에 또 다른 녀석을 떠나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지금 네가 있는 그곳에는 신나게 달릴 수 있는 넓은 들판이 있기를. 

추위 많이 타는 네가 즐겁게 놀 수 있도록 겨울도 없기를.

활동양 많은 너도 살이 좀 붙을 수 있게 먹을 것도 많기를.

그리고 까비 만나거든 안부도 잘 전해주길. 

까비는 다른 개들을 싫어하니 쌀쌀맞게 굴어도 맘상하지 말기를.



  오랜만에 이웃사촌

구수한 풍경


오랜만에 이웃사촌이 생겼다.

산속에 외딴 집이지만 말 주인분이 한 울타리에 사셔서 집 밖에 나가면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다. 보통 여행할 때 아니면 오이군도 나도 집에 쳐박혀 있고, 딱히 낯선이에게 사교적으로 다가가는 타입도 아니라서 서울에 사는 동안은 한번도 이웃사촌이란 것이 없었는데, 여행하면서 이렇게 이웃이 생기는 것이 우리에겐 나름 신선한(?) 경험이다. 이게 무슨 동굴에 갖혀 산 것같은 소리일까. ^^;;



날이 아직 따뜻할 땐 동네 분들과 바베큐를 하시는데, 초대를 받기도 했다.

사람냄새나는 시골 체험. 도시 여자는 이런 것도 다 신기하다. ^^;



  말과 별이 빛나는 풍경

총체적 난국


이 목장과 집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마을도 멀고, 근처에 다른 농장도 멀어서 달이 뜨지 않은 밤이면 그야말로 내 손가락도 안보이게 밖이 컴컴하다. 

별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천국같은 컨디션이다.

다만 가을부터 계속 날씨가 안좋거나 맑은 날은 달도 밝아서 별이 잘 안보였는데, 드디어 달이 뜨지 않은 맑은 날이 찾아 왔다. 그래서 계속 벼르고 있던 말과 별 사진을 찍으러 나갔는데...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 말들은 밤중에도 말똥말똥 깨어 사진기에 엄청난 호기심을 보였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뒤에서 불쑥 다가와 침을 잔뜩 묻히며 스윽 핥기도 하고, 한참 장노출로 찍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고개를 들이 밀고, 렌즈를 덥썩 물어보기도 한다. 한녀석이 안움직이고 뭔가에 집중하는 것 같아 좀 찍어보려니 뽀대 안나게 밥통에 30분째 머리 박고 움직이질 않는다. 이시간에 밥을 줬을리 없건만 뭘 저렇게 쳐묵쳐묵. -_-;

결국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우아한 말의 사진은 상상속에만 머무르고, 별이 총총한 김녕 산 기슭에서 밥먹는 말사진을 한장 건졌다. 이것도 아슬아슬하게 노출을 마쳤는데, 호기심 왕성한 어린 말이 삼각대 넘어지지 말라고 걸어 놓은 가방이 궁금한지 자꾸 물고 도망가려고 해서 방어하느라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보통 겨울 별 사진 찍을 때 안움직이고 가만히 있다보면 엄청 추운데, 이날은 녀석들 때문에 정말 땀이 다 나더란. ㅋ



그 와중에 재미있는 심령사진이 한장 나왔다. 분명 오이군은 말 머리에 손을 얹고 찍었는데, 사진속엔 오이군 혼자만이...

드라큐라 말이었던걸까? 오이군이 결과물을 보고 뭐야, 오싹하게...라고 ㅋㅋ

나는 플래쉬라이트로 사람이 하얗게, 특히 밤에 번쩍이며 나오는 사진을 무지 싫어해서 약한불을 살짝 비췄더니 검은 말에게는 너무 약했던 모양이다. ㅋㅋ



  또다시 안녕!

잦은 헤어짐, 언제쯤 익숙해 질까


이런 저런 일상을 보내며 3개월이란 시간을 이 목장에서 보냈다.

설레여 하며 왔는데, 어느 새 또 짐쌀 시간이 되었구나.

헤어짐이 있어야 만남도 있다지만 매번 떠날 때 너무나 아쉽다.

그만큼 여지껏 머물렀던 우리나라의 그 모든 곳이 좋았다는 이야기겠지.

바다가 있어서, 산이 있어서, 들이 있어서, 동물이 있어서, 도시가 있어서.

이미 모든 곳이, 모든 시간이 너무나 그리운데, 다음에 기다릴 것들을 기대하는 것으로 그리움을 억눌러 본다.

헤어짐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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