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기찻길
시골길이 그리운 날
완연한 봄이 왔다.
아무것도 하지말고 오늘은 집에서 쉬자며 오이군과 꼭꼭 약속했던 주말, 화창한 햇살이 집안 구석 구석을 들쑤시고 다니며 게으르게 데굴거리는 감자, 오이를 몰고 다녔다.
우릴 좀 내버려두라며 방구석에 움크리고,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지만 결국 햇살이 쏟아부어주는 죄책감이 승리를 했다.
이 화창한 날, 집에 있으면 되겠는가. 햇살에 대한, 들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이왕 나가기로 한 것, 저어 멀리 교외로 나가고 싶었으나 이미 해는 중천에 떠올랐고, 뚜벅이 가족인 우리를 재빠르게 교외로 데려다줄 이동 수단이 없었다. 그때 딱 떠오른 곳이 바로 항동 기찻길. 예전부터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번도 가 볼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딱 좋은 목적지였다.
큰 지도에서 항동 기찻길 보기
바로 지도위의 빨간 선이 항동 기찻길로 지하철 1호선 역곡역에서 내려 항동 저수지 방향으로 걸으면 다다를 수 있다.
기찻길은 오류동역에서 시작하여 시흥시 부근까지 이어지는데, 오류동역 에서 굿모닝 아파트 근처에는 이미 문명의 손길이 닿아있으므로, 역곡역이나 온수역에서 내려 항동저수지에서부터 시흥 방향으로 걷기를 추천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가는 방법
온가족이 함께하는 봄나들이
햇살은 감자와 오이뿐만이 아니라 야채커플의 애견, 까비양에게도 속삭였던가보다. 까비양이 현관문에 코를 묻고, 쉭쉭 바람을 불어댄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이 문이 열리리라는 확신이 있는 듯하다.
14살임에도 만년 강아지 소리 듣는 우리집 귀염둥이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모시고'산책갈 방법을 연구해 보았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 기차 등에 애견을 데리고 탈 경우에는 반드시 캐리어에 머리나 꼬리가 나오지 않게 넣어서 다른 승객에게 불쾌감과 위화감을 주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캐리어도 없을 뿐더러 한국동물보호연합회에서 정리한 내용을 보면, 사실 지하철 1-4호선에는 규정상 애완동물의 탑승이 불가함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맨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그래서 일단 짧게 산책이나 시키자며 데리고 나오긴 나왔는데, 이렇게 꽃밭에 묻혀 초롱초롱한 눈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집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끼리만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생각해낸 방법은, 까비양 자전거 태우기.
바로 요렇게 까비양을 자전거 앞바구니에 태우고 가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당황한 까비양이 뛰어내리려고 발악을 했으므로 목줄을 메는 조끼에 목줄대신 긴 끈을 걸어서 안전벨트를 만들어 자전거에 묶어줬다. 줄을 살짝 느슨하게 묶어서 애견이 몸을 세우고 앉거나 편하게 엎드릴 수는 있지만, 뛰어내릴 수는 없도록 길이조절을 잘 해주는 것이 관건이다. 자전거가 덜컹거리면 아플까봐 푹신한 쿠션도 깔아줬다. 이만하면 나도 섬세한 엄마다. 흐믓. ^^
드디어 까비양이 바구니에서 안정적인 자세를 잡고 앉는 방법을 터득해서 가방을 둘러메고, 오늘의 산책길에 올랐다.
기차길로 오막살이~
서울에 기찻길이 있다고?
7.3kg에 달하는 중형 비만견을 자전거 앞바구니에 실었더니 처음에는 중심잡기가 힘들었는데, 금새 익숙해 지더라. 처음에는 안죽겠다고 두 앞발로 바구니 양 끝을 붙잡고, 버티던 까비양도 어느새 두 귀를 뒤로 쫑긋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바람을 즐기기 시작했다. 앞발 한쪽도 스타일리쉬하게 바구니 밖으로 편안히 빼고, 한쪽으로 기대 앉아서 흔들 흔들 속도감을 즐기는 눈치다.
날나리 비만견 같으니라구...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사진을 찍어 주고 싶었는데, 자전거 핸들을 양쪽으로 잡지 않으면 까비 때문에 중심잡기가 힘들어서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 마음속에만 고이간직.
드디어 긴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기찻길에 도착했다.
아니 이곳이 정녕 서울이란말인가?
그렇다. 부천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지만 행정구역상 이곳은 서울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부천 역시 매우 번화한 도시이다.
그 번화한 두 도시 사이에 바로 이런곳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미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사진의 다정한 두 친구처럼 우리도 손잡고 걷는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었지만 사진찍어줄 사람이 없다. 식당개 삼년이면 라면도 끓인다는데, 까비는 아직 내공이 부족한가보다. 내가 그렇게 쉬지 않고 찍어대는데, 찍는 법을 배우는 것은 고사하고, 아직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화들짝 놀라 팝콘튀듯 도망가 버린다. 하긴...내가 해외로 배회하고 다녔던 칠년간 떨어져 있었으니 배웠더라도 다 까먹었겠다.
가다보니 기찻길 밑으로 물길도 지나간다. 바짝 말라있는 물길에 폴짝 뛰어내린 오이군. 까비양과 눈높이를 맞춰주겠다며 내려갔으나 전혀 관심없는 까비양, 냄새맡느라 너무 바쁘다. 항상 무슨 냄새를 저렇게 맡고 다니는 걸까.
대체 동물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누군가 동물들의 생각을 영상이나 글로 표현해 주는 기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론 알고 싶지 않다. 식사때 마다 왜 나는 안주고, 너 혼자 다 먹는거냐며 엄청나게 불평할 것 같다.
과수원엔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어있고,
기찻길에서 으례 하는 균형잡기 놀이도 해보았고,
영화에서처럼 담력테스트 한다며 철로에 누워도 보았다.
좋다.
나오길 잘했다.
햇살아, 우릴 밖으로 몰아내줘서 고맙다.
사실 이곳에는 아직도 하루에 한두번 화물선이 지나간다고 한다. 화물선 시간표도 모르는데, 따뜻한 햇살아래 실바람 솔솔부는 기찻길에 누워있으니 잠이 왔다. 자면 안돼, 자면 안돼, 자면 안돼...
불면증이 있는 나는 모처럼 와준 잠을 억지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목숨걸고까지 자고 싶진 않아서 애써 잠을 떠나 보냈다.
이러다 기차오면 정말 난감하니 좋은생각이 아니라며 구박하더니 결국 오이군도 내 옆에 데굴 누웠다.
둘이 누워서 아무도 없는 하늘 길을 뚜벅뚜벅 걸어보았다.
언젠간 이 하늘 길을 모두 걸어 세계여행도 하고, 달나라나 화성까지 가보자 하고나니 급 너무 즐거워서 둘이서 마구 희희덕 거렸다.
기찻길 옆 농장에서 거위가 꽥꽥 거린다. 자유로운 인생은 아니지만 연못까지 있는 나름 호화로운 저택에서 생활 하는 녀석이다. 한가운데 거만하게 머리를 치켜틀고 앉아서는 성주 행세를 한다. 눈빛이 마치 이 성은 내 성이니라. 쳐다도 보지 말거라. 하고 외치는 듯. 신기해서 쳐다보는 맞은편 아줌마에게 죽어라 꽥꽥린다.
이름모를 꽃들이 가득히 피어있는 기찻길. 일단 멈춤이라는 오랜만에 보는 표지판.
이 모든것을 서울하늘 아래에서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기찻길이 물길위로 지나가기도 하는데, 저 아래 비춰보이는 내모습이 매우 멀게 느껴진다. 나름 높이가 꽤 된다는 이야기다.
틈이 조금 넓으니 다리가 근질근질한지 까비가 부들부들 떨며 건너지를 못한다. 그런 까비양을 꼬옥 부둥켜 안고 함께 건넜다.
그런데, 무모하게 용감함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오이군은 이쯤은 뛰게 습관(?)을 들여주라며 그냥 혼자 성큼성큼 앞서 간다. -_-;
에효...이것이 자식교육에 관한 엄마와 아빠의 견해 차이다. 까비가 5살만 젊었어도 내가 시도해 볼텐데, 지금 14살이 넘었다 아이가. 개 나이로 치면 중장년급인데, 이제 이런거 무리 인듯...
앗! 그런데, 요번엔 물길위로 뻗은 기찻길보다 더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 커다란 대형견 두마리도 주인과 함께 어슬렁 어슬렁 주말 산책을 나온것이다.
우리 까비양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있다. 바로 개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을 봐도 짖지 않고, 고양이도 신경쓰지 않고, 새가 주변에 얼쩡거려도 무시하는 까비양이 지나가는 개만 보면 죽어라 쫓아가서 짖고, 덤비고, 으르렁거리고, 물려하고 그야말로 생 난리를 친다. 그러다 예전에 한번 커다란 개가 덥썩 물어서 옆으로 스윽 패대기 치는 바람에 호되게 당한적도 있는데,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개만 보면 기를 쓰고 덤빈다. 그냥 개는 다 싫댄다. -_-;
요번엔 오이군도 위험을 감지하고 까비양을 안아 올렸다.
이렇게 항동 깃찻길은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산책로이다.
차가 다니지 않으므로 반려동물들도 오랜만에 목줄에 메이지 않고, 신나게 모험을 떠날 수 있다. (맹견이 아니라면)
기찻길은 주변의 낮은 산길과 연결하여 지나 갈 수 있으므로 여러 산책코스를 조합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구로구에서는 구로올레길이라 하여 지방하천과 산길을 조합한 추천 산책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항동기찻길은 올레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온수역에서 하차하여 지도상의 빨간 산림형코스 3을 따라 천왕산 부근으로 오다보면 만날 수 있다.
서울에 사는데, 어느날 급 시골의 정취가 그립다면, 추천하는 코스이다.
동물도 사람도 행복한 길
여행일자 : 2013.04.27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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