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속에 파묻혀 보낸 일주일

바람따라 흩날리는 토종감자꽃

원주에서의 두달을 보내고, 새로운 정착지로 가기 전, 감자와 오이는 한달동안 각자 여행을 하기로 했다. 각자 한다니 무슨 일인가 눈을 크게 뜨시는 분들 계시지 싶은데, 둘이 대판 싸우고 틀어진 건 아니고(^^;) 오이군이 매년 3-4월 즈음 가족,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스위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스위스엔 2년에 한번 정도만 따라 가기로 해서 올해는 한국에 남아 홀로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는 집이 없으므로 혼자 월세를 내고 원룸에서 지낼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럴 바에야 오랜만에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매인 일도 없겠다, 집도 없겠다, 결혼 전, 싱글로서만 느낄 수 있었던 낭만을 살려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한달 중 첫주는 오랜만에 친정에서 가족들과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고, 둘째주는 일본취재와 원고작성으로 보냈고, 셋째주는 남도 꽃여행으로 보냈고, 넷째주는 청산도 여행으로 보냈다. 사실 중간 중간 여행기를 올려 보겠다는 야무진 꿈도 갖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번달에 원고요청을 조금 많이 받게 되서 밤마다 게스트하우스 구석에서 쪼그리고, 눈에 불을 켠채 (게스트하우스 다인실에서 밤 늦게까지 전등을 켜 놓을 수 없었으므로 눈에 켰다^^;) 일하느라 블로그에 소식을 전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중간에 식중독도 한번 있었고...-_-;

그래서 일단 가볍게 들려 드리는 남도여행 스케치.



  진주 - 그녀와 함께 걸었던 진주성, 촉석루



미소가 예쁜 그녀. 

그녀와 함께 관광보다는 수다가 목적이었던 진주성 나들이.



진주성은 생각보다 넓어 수다떨어가며 오후에 진주성을 다 돌아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꿈도 야무졌었지.

그래도 그녀 덕분에 아직 꽃도 다 피지 않았던 진주성이 화사한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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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 아주 오래된 낭만, 다원



그녀가 폭풍검색으로 물색해둔 카페겸 바.



역시 센스있는 그녀의 안목은 탁월했다.

감자의 취향저격.

평소 말술이 기본인데 겨우 칵테일 두잔으로 밤새는 줄 모르게 했던 낭만 아지트, 다원. 할수만 있다면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두고 싶은 곳이다.



  광양 - 벚꽃보다 수줍은 매화, 향기로 이야기하다



물빛이 청순한 섬진강.

그 예쁜 물빛을 보고 살아서 일까? 그 주변엔 온통 청순하게 생긴 것들로 가득하다.

밝은 모래사장 빛깔이 그렇고, 은은한 향기의 매화가 그렇다. 이제 곧 섬진강 일대를 뒤덮을 벚꽃이 또 그렇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광양매화축제.

근데 광양이 아니라 하동에서 더 가깝다는 게 함정. 하마터면 진주에서 광양가는 버스 타고, 40분 걸려 하동으로 되돌아 올 뻔 했다. 진주에서 하동까지 한시간밖에 안걸리는데.


축제장은 당연지사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데, 먹거리 장터가 목적이 아니라면 축제장 매화농장이 아닌 다른 매화 농장을 찾아가도 무방하다. 하동부터 구례까지 섬진강 유역의 산이 전부 매화과수원이기 때문이다.



청매실 농원 끝까지 올라가니 이런 별세계가 펼쳐진다. 인파도 사라지고, 황토색의 마른 풀들이 연두빛 대지로 변했다. 엘프의 숲 같기도 하고, 호빗 마을 같기도 하고.

우리는 또 이곳에 하염없이 앉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섬진강 유역엔 특산물이 참 많기도 하지. 매화가 남긴 선물 매실, 섬진강의 모래사장에 사는 재첩, 강유역 지리산 기슭에서 자란 녹차 그리고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크는 벚굴까지. 그 중에 단연 우리의 침샘을 자극했던 것은 여자 손바닥보다 큰 벚굴이었다. 여섯개에 삼만원으로 한개에 오천원 꼴이지만 운치에 취해 한번쯤은 먹어보자며 쿨하게 주문했는데...

정말 한번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녀도 나도 식중독으로 이틀을 고생했다. 보통 굴과 달리 독이 늦게 생겨 봄에도 먹을 수 있고, 특히 벚꽃 필 때 가장 맛있어서 벚굴이라는데, 벚굴 자체의 독이 아니더라도 계절과 관계 없이 노로바이러스에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아무래도 축제장 포장마차이다보니 신선도든 청결도든 무언가가 떨어졌던가보다.

먹을 땐 매실 동동주에, 재첩이 송송박힌 파전에,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제일 우아한 한량이었는데, 그 이후로 이틀간 나는 극한의 여행을 경험했다.



  진주 - 벚꽃이 피기 전 쌍계사에는...



주말이 지나고 나는 혼자가 되어 쌍계사를 찾았다.

삼년전 요맘때 즈음 이 부근을 오이군과 함께 찾았었는데, 이번에는 혼자다.


 관련글  십리 벚꽃 혼례길, 그대 손잡고


쌍계사라는 이름을 들으면 동시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연두빛 녹차밭 위로 하아얀 벚꽃이 우수수 날리는 모습.

일생에 딱 한번 본 풍경인데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쌍계사라는 단어와 뗄수 없게 딱 붙어 버렸다.

하동의 화개장터와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6km에 달하는 길은 십리벚꽃길 또는 혼례길이라 불린다. 이곳을 남녀가 함께 걸으면 백년해로 한다고 한다. 그 쌍계사를 이번에는 벚꽃이 피기 전 방문해 보았다. 뭔가 약간은 황량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벚꽃이 없어도 이곳은 꽃대궐이다. 온통 매화와 산수유로 알록 달록 물들어 있었다.



봄이 와서 먹을 것이 조금 더 많이 졌는지, 통통하게 입안에 무언가를 잔뜩 넣은 다람쥐 한마리가 쌍계사 기왓장 위를 바람처럼 내달렸다. 다람쥐들은 어찌나 행동이 빠른지 그들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느리게 보이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는 그중에서도 정지영상에 가깝겠구나...



  하동 - 최참판댁, 가상의 공간이 현실로



누구나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국민소설 토지. 박경리 선생님의 작품인데,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그녀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평사리에 소설속에 나왔던 인물들의 집을 진짜로 지어뒀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허구의 세상을 현실로 만들어 놓은 것이지 실제 존재하던 것들은 아니다.

그러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안내센터 직원에게 이 사람이 어디 최씨인지, 고택이 몇년도에 지어졌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아무리 허구속의 공간이라고 설명을 드려도 계속해서 족보가 어찌되냐고 물으신다며 문화 해설사분이 지친 목소리로 한탄하셨다. ^^;



최참판댁 앞마당에 앉아 바라보니 비옥한 평사리 들판 가운데 우아하게 매화에 둘러 싸여있는 부부송이 보였고, 그 뒤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어쩌면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모든곳이 그림같이 아름다울까.

버스에서 만난 동네 주민이 자기도 부산에서 시집와서 30년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매년 꽃이 필 때면 새삼스럽게 예뻐서 감탄한다고 했다. 매일 보면 무뎌질 법도 한데, 매일 매일 새롭게 감동을 준다고. 


그런데, 어쩌다보니 내가 박경리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다니는구나.

원주는 박경리 선생님이 마지막 원고를 집필하신 곳으로 박경리 문학관과 토지문학관이 있었다. 그녀가 직접 거주하며 글을 썼던 집도 남겨져 있어 낮에는 구경을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 어쩌다 보니 그 소설속의 공간 최참판 댁에 와 있고, 다음 '살아보기' 여행의 목적지는 통영인데, 통영은 박경리 선생님이 태어나신 고향이다. 아마 나는 한번도 이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박경리 선생님을 은근 사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구례 - 구례옥잠, 나의 힐링캠프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게스트하우스다.

너무 더러워서 기억에 남는 곳도 있었지만 그곳은 열외하고, 가장 아늑해서 기억에 남는 곳을 꼽자면 단연 이곳, 구례옥잠이었다.

구례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낡은 단독주택을 구입해 젊은 부부가 손수 뚝딱뚝딱 고치고, 인테리어를 했다고 한다. 말이 뚝딱뚝딱이지 집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말투에 오랜기간 공들인 흔적과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센스 넘치는 데코와 5성급 호텔도 울고갈 깨끗함이 가장 감동이었고, 작은 공간이지만 어디에 있어도 내집처럼, 아니 내집보다 (깨끗하고) 편안하게 느끼도록 준비해 둔게 놀라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벚굴 식중독으로 매우 허기진 상태였는데, 다인실을 예약했음에도 아프니 푹 자라고 2인실을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게 내어 주셔서 이틀만에 식중독을 약도 안먹고 자가 치유했다. ^^; 게다가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전기요가 깔려 있는 곳이 몇군데나 될까. 도착한 날은 열이 조금 오르는 듯 했는데, 전기요 덕분에 뜨끈하게 푸욱 잤더니 식중독은 물론 며칠 돌아다니며 쌓인 피로까지 말끔히 풀리더라.


이곳을 힐링캠프 삼는 것은 게스트들 뿐만이 아니다. 주인장보다 훨씬 오래전 부터 이곳 마당에서 터줏대감 행세를 했다는 고양이들도 그렇다. 엄마 고양이와 아기고양이(다큰 아이들) 두마리가 이곳에서 밥도 먹고, 장난도 치고, 휴식도 취한다. 길고양이 치고는 삶이 꽤나 아늑해 보인다. 다 따뜻한 주인장 부부의 배려 덕분이겠지. 게스트 하우스가 다 이집만 같다면 절대 호텔은 안갈 것 같다.



  구례 - 사성암으로 떠난 극기훈련



구례에 도착한 첫날.

하동에서 30분 남짓 걸렸는데, 재밌게도 사투리가 바뀌었다. 아침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들었는데, 오후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들린다. 웃긴건 전라도 사투리는 어릴때 부터 듣던거라 (아버지가 전라도 분) 처음엔 구례가 사투리를 안쓴다고 생각 했던 것. ^^;


이날은 아침부터 체한듯 구역질이 나고, 배탈도 나길래 하루종일 굶어서 기운이 없었다. 나는 단순히 체한줄 알았는데, 나중에 같이 벚굴을 먹었던 그녀에게 연락해보니 병원에 다녀왔다고 한다. 식중독이 맞구나. 비싸서 인당 세개씩 밖에 못먹었기를 망정이지. -_-;

집에서 이랬으면 죽는다고 호들갑이었을텐데, 공기 좋고, 풍경 좋은 곳에서 아프니 아무리 아파도 가만히 누워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병원은 고사하고 약도 안먹었는데, 쫄쫄 굶어서 당떨어진 몸을 이끌고 사성암을 찾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이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성암을 선택했을까? 사성암은 엄청 구불 구불 가파른 길을 과속질주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십여분간 올라야 한다. 밥을 든든히 먹어도 멀미가 날 판에 속이 비었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려서는 또 어떻고. 무지 경사도가 큰 길을 따라 올라야 사찰 마당에 도착할 수가 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사찰 마당에서 암자에 오르려면 또다시 가파른 계단을 헉헉거리며 올라야 했다. 다행히 고생한 만큼 풍경은 아름답다. 절벽에 지어진 암자라서 시야가 엄청나게 확 트여있다. 지리산에 포옥 안긴 구례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내가 그간 몸에 비축해 둔 에너지(지방)가 꽤나 많았던 모양이다. 쫄쫄 굶고 그 계단과 오르막을 다 올랐는데도 멀쩡히 살아서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기운은 쪽 빠져서 씻자마자 저녁 8시부터 쿨쿨 골아 떨어져 버리긴 했지만.



  구례 - 운조루와 곡전재  



오래된 가옥 운조루. 문화재로 지정되어 가치를 인정받은 민간 가옥이라는데, 집 주인인듯한 할머니가 1천원을 입장료로 받으신다. 음....예쁘긴 한데, 뭐 그렇게 엄청나게 크거나 볼거리가 있는 많은 것이 아니라서 1천원을 받는 건 살짝 납득이 안간다. 뭐 그래도 개인주택이라니 주인 맘이라 할말은 없다면서도...

조금 더 풀이 돋아나면 예쁘려나? 마당에 매화나무 한그루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황량하여 딱히 관리가 잘 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곡전재라는 집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가옥 중 하나라는데, 둘러보며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 개인가옥인데, 여긴 입장료도 없다. 그런데, 집은 훨씬더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진짜 예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마당에 작은 시내가 흐르고, 연못에는 잉어들이 노닌다. (모기 많으려나?) 

나가는 길에 오래된 물건들을 자율판매하는 매대도 놓여 있다. 뭔가 뜸금 없어 보이는 목마가 탐났는데 (사진 오른쪽 중간), 저걸 지고 다닐 방법이 없어서 아쉽지만 언젠가 집있는 그 날을 기약해야 했다.




  구례 - 산수유 축제, 상관마을  



꼭 한번 오고 싶었다.

노오란 산수유가 굽이 굽이 파도치는 지리산에.

다 이루었노라.

만개 시기도 맞추었노라.

이런거 진짜 운없는 내가 웬일이래니. 

이번엔 어디든 가기만 하면, 꽃들이 최전성기를 자랑했다.

행복했다.

배가 아프고, 토할 것 같고, 구례 공중화장실 투어를 하고 다녀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진정한 풍류를 아는 그대.

정말 멋지군요.

나는 당신의 연주에 한눈팔다가 버스를 놓쳤어요.

한시간 반을 추운데 떨며 기다려야 했어요.

거지 같이 보였겠지만 너무 추워서 문닫은 포장마차 가스통 사이에 앉았어요.

배아프고, 당떨어져 손떨리는 나는 그렇게 구례의 마지막 저녁을 보냈어요.



흠. 그래도 이틀 내내 굶고 십몇킬로미터를 걸어댕겼더니 얼굴이 좀 갸름해 보이네.

좋은 점도 있었구나.

지금은 광속 원상 복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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