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축제 속으로

삽질 가득 화이트 데이



지난 토요일은 화이트 데이로 오이군과 가벼운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신도림 디큐브로 향했다. 사실 오이군은 평소 눈여겨 봤던 카페도 순회하겠다고 계획했다는데, 감자양이 뜻하지 않게 신나게 불금을 달린 관계로 카페는 생략.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예전에는 2박 3일 술마시고도 다음날 멀쩡하게 출근했는데, 지금은 잠깐 저녁에 나가 놀아도 일주일이 뻐근하다.



아빠, 바닥에 누가 초컬릿을 버렸어. 이거 내가 먹어도 돼?


오이군이 기다리는 눈치가 느껴서서 벌떡 일어나 꽃단장을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꽃단장은 자꾸 꿈속에서만 한다. 계속해서 침대로 녹아드는 내 몸뚱이. 아무래도 더 버티면 해가 질 것 같기에 삐그덕 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거실로 나와봤더니 이렇게 데이트 초대장이 도착해 있다. 방에서부터 현관문으로 이어지는 초컬릿 길.

센스 만점 남편 덕에 약간 힘이 솟아 치장을 마치고 룰루 랄라 데이트 길에 올랐다.



첫번째 목적지는 디큐브 지하에 있는 무스토이 매장. 무스토이는 도자기 인형에 이쁘게 색칠해서 나만의 인형을 만드는 곳으로, 디큐브를 왔다 갔다 하며 눈여겨 봐 뒀던 곳인데, 이렇게 청천벽력같은 메세지가 붙어 있었다. 야심차게 코스를 준비했다며 나를 이 앞으로 데려갔던 오이군은 잠시 당근이 되었고.

푸핫...또오?

우리가 오래전 데이트 하던 시절부터 워낙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이젠 한구석으로 뭔가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맨날 어딜 가든 오늘만 휴일, 어제부로 폐업, 임시휴장, 금일영업종료 등의 메세지가 붙어있곤 했다.

어이 없다고 둘이 낄낄거리며, 비어버린 시간을 떼우기 위해 커페에 들어갔다. 그런데, 웃느라고 그만 자리를 맡기전에 케익을 주문해 버렸네? 접시에 조각케익을 받아들고 보니, 자리가 없다. 결국 카페 한구석에 오손 도손 서서 먹었다는. 끊임없는 삽질이 이어지는게 오늘은 뭔가 시작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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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패트릭 데이 축제

감자와 오이를 알아 본 폴란드 인을 만나다


그런데, 아까부터 주변에 외국인이 무지 많다. 신도림에 외국인이 종종 눈에 띄긴 하지만, 오늘같이 많이 보인적은 없었는데, 한국 사는 외국인들이 주말에 다 디큐브로 놀러 오나? 이들도 화이트 데이를 챙기나?

그런데, 가만히 보이 오늘이 성 패트릭 데이 인가 보다. 쉐라톤 호텔에서 팝업 스탠드를 세워 놓고, 으깬 감자와 소세지 등을 팔고, CU편의점에선 밖에 얼음 채운 냉장고를 꺼내 놓고 맥주를 팔고 있다. 뭐지? 날씨가 쌀쌀해서 맥주가 춥게만 보이는데, 아니 그보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성 패트릭 데이를 챙겼담?


성 패트릭 데이는 3월 17일에 열리는 아일랜드의 축제로, 5세기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패트릭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모두 초록색 옷을 차려 입고, 거리 파티를 즐긴다. 아일랜드 이민자가 많은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축제를 한다는 것은 알았는데, 언제부터 한국에서도?



알고보니 아일랜드와 국교 수립을 기념하기위해 매년 청계천에서 기념 행사가 있었다고. 올해는 디큐브에서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신나는 콘서트가 시작되기에 우리도 얼떨결에 같이 앉아 공연을 즐겼다. 우리나라에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있나 싶었는데, 빨간 머리와 피부가 특히 흰 사람들이 오늘따라 잔뜩 눈에 띈다. 정말 아일랜드 사람들이 한국에도 사나보네. ^^; 그리고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아일랜드 특유의 억양. 이 들은 뭔가 늘 신나 보여서 친근감이 든다.



우리도 어영 부영 돌아다니다 풍선을 하나 받았다. 그리고 이 풍선은 2가지 놀라운 이벤트를 우리에게 앉겨 주었다.


그 첫번째는 이 풍선을 우리에게 건네준 사람. 

어떤 외국인이 풍선을 들고와 반갑게 인사하며 말을 걸기에 오이군보고 아일랜드 사람이냐 물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스위스 사람이냐고 하는게 아닌가? 별로 전형적인 스위스인 얼굴은 아닌지라 깜짝 놀랐는데, 더 놀라운건 나보고 너는 감자고, 늬들은 마리오 옷을 입고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뭐..뭐지? 과거를 보는 사람인가? 타로점이라도 쳐줄려고 하나?

알고보니 그 사람은 폴란드인 인데, 강원도에서 아이리쉬 와이프와 살고, 우리 블로그를 즐겨 봐서 단번에 알아봤다고 한다. 엄마나? 정말 신기하네. 한글로 쓴 블로그를 외국인이 즐겨 봐 준다는 것도 그렇고, 한번도 누가 길에서 우릴 알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엄청 신기하고,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 사교성과는 담 쌓고 사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한지공예가 커플아닌가. 늘 각자의 책상과 마주보고, 대화없이 일하는게 습관이 되서, 고맙다는 말대신, 어떻게 한글 포스팅을 읽었냐는 질문 대신, 그냥 놀라 멍하니 웃으며 바라만 봤다는. (사실 어제의 과음으로 좀 멍한 상태였던 건 절대 비밀.)


※ 혹시 그날 저희와 만나신 분 이 포스팅 보신다면, 블로그 찾아와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날 블로그 한다고 하셨는데, 아래 답글에 주소도 남겨 주세요. 만나서 반가왔습니다. ^^





아일랜드 국기



 성 패트릭이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클로버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클로버를 이용한 장식을 많이 볼 수 있다


축제의 의미는 우리에게 크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타지에 살며 고향이 그리울 그들에게 좋은 시간이 되었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 지더라. 오래전의 나였다면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자기네 축제를 하고 저러나 했을지도 모를텐데, 7년넘게 타지 생활 하고나니,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나도 호주나 스위스 살 적에 추석, 설날 등 명절 풍경이 그립지 않았던가. (막상 한국에 오니 딱히 감흥이 없지만 ^^;) 어쨌든 덕분에 주말 해외여행을 한 기분이 들어 재미있었다.



보너스 이야기 : 레알 화이트데이 깜짝 이벤트

감자 오이 테러리스트 된 사건


신나게 공연을 보니 배가 출출해져서 밥을 먹으러 갔다. 화이트데이니 비싼 한우를 사주겠다 해서 룰루랄라 풍선을 통통 퉁기며 근처 고깃집으로.



그런데, 여기서 풍선과 관련된 오늘의 두번째 서프라이즈가 벌어졌다.

쌀쌀한 날씨에 밖에서 불어진 풍선을 따끈 따끈한 방바닥에 올려놨더니 공기가 팽창됐는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빵 하고 터져버린거다. (아, 야속하고, 놀라운 과학의 세계여!) 무지 큰 고깃집에 오늘따라 손님이 가득했는데, 정말이지 순식간에 모든 사람이 얼어붙은 듯 가게안이 고요해졌다. 그리고는 잠시후 누군가 입을 열었다.

뭐야? 가스야? 테러야? 뭐가 폭발한건데?

그와 함께 술렁이는 사람들. 이를 어쩐다. 오이군이 엉거주춤 풍선 조각을 주우며, 서툰 한국어로 죄송하다고 우물거리자, 갑자기 주변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우리의 등짝으로 내리 꽂혔다. 특히 내 뒤에 있던 할머니가 어찌나 째려보시던지 등에 삼지창 맞은 기분이 -_-; 가게 주인이 죄송하다며 풍선이 터진거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공개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쪽 편 사람들은 여전히 행동을 멈춘 채 범인 찾기에 혈안이다.

누구야, 누구야? 누가 그런거야?

오이군도 아까 무스토이집이 폐업한걸 발견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당근을 넘어선 딸기가 되어 갑자기 반찬을 열심히 뒤적거린다. 나도 할수만 있다면 숯불이 활활 타오르는 테이블 밑으로라도 숨고 싶더란. (공간이 너무 작아서 내 큰 몸뚱이가 들어가지 않았길 망정이지.)



이벤트 풍선(조가리)과 함께 기념샷


올해는 그 어느 해의 화이트 데이 선물보다 기억에 강렬히 남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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