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스위스가 그립다

한국의 겨울보다 덜 춥다면 믿으시려나요?


나는 오이군과 함께 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스위스에서 보냈는데, 많은 이들에게 평화로운 낙원으로 떠오르는 그곳이 내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외국인으로서 현지인들과 경쟁하며 살아가려니, 같은 일을 해도 남들보다 두배로 노력해야 인정을 받고, 공부를 해도 늘 언어공부와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두배로 걸렸다. 게다가 그 전에 2년간 머물렀던 호주의 오버 친절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내게, 수줍고 낯가리는 스위스 사람들은 거의 얼음장벽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자연환경도 그렇다. 나는 바다를 가장 좋아하는데, 스위스는 대륙 한가운데 있는 나라로 바다가 없다. 일년의 절반은 비가 오고, 여름 두어달을 제회하고는 쌀쌀한 늦가을 같은 날씨가 길게 이어진다. 다행인 건 대부분의 도시는 호수를 끼고 있어서 한겨울에 한국보다 덜 춥다는 것인데, 그나마도 호수 때문에 겨우내 물안개가 걷히지 않아서, 우울증으로 자살률을 높이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는 지금, 가끔 문득 스위스의 어떤 것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처음엔 그렇게 답답하고, 불편했던 그 나라에 어느새 나도 조금씩 녹아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겨울이 오면 그렇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고, 손이 시려워 뜨것운 핫팩이 필요한 크리스마스 즈음에 말이다.

11월 말 부터 여기 저기 생기는 크리스마스 마켓의 아기자기한 불빛, 꽁꽁언 손을 뜨끈하게 녹여주는 뱅쇼, 신비롭게 거리를 감싸는 물안개... 

그중에서도 한국으로 홀딱 들고 왔으면 좋겠는 것은 바로 바젤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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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나라가 만나는 곳, 바젤 Basel

크리스마스가 오면 찾게 되는 곳


크리스마스 마켓은 사실 유럽에서는 11월 말 부터 크리스마스 전까지 크고작은 도시 곳곳에 열리는 흔한 시장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기 위한 곳인데, 각종 수공예품과 지역 특산물 등이 주를 이루고, 먹거리와 뱅쇼 등도 팔기 때문에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우리는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동네 방네 크리스마스 마켓 순회를 다녔다. 바젤, 베른, 몽트뢰, 뉴샤텔, 취리히, 루체른, 로잔, 비엘 등의 스위스 대도시는 물론, 가끔 프랑스 파리까지 마켓 구경하러 원정을 가기도 하고,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 미니 사이즈로 열리는 시장들까지 틈틈히 찾아다녔다. 사실 둘다 쇼핑은 좋아하지 않는데, 다양한 수공예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전부 살짝 들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녀봐도 우리를 폭 사로 잡는 건 언제나 바젤에서 열리는 마켓이다.


뱅쇼 : 불어로 뱅쇼 Vin chaud, 독어로 글루바인 Glühwein, 영어로 몰드와인 mulled wine 등으로 불리는 향신료와 오렌지즙 등을 넣고 끓인 레드와인이다. 나라나 지역에따라 들어가는 향신료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뜨거운 와인이란 뜻이다. 그러나 vin chaud라는 단어는 발음을 한글로 쓰는 것이 애초에 불가는 하기 때문에, 프랑스에가서 또박 또박 뱅.쇼. 주세요. 이러면 전혀 못알아 듣는다. -_-; 오이군도 못알아 듣는다. 주문했는데, 상대방이 못알아 듣거든 뱅에서 v 발음을 제대로 신경써 주고, 쇼의 ch를 발음할 땐 입안에서 혀를 둥글게 부풀리는데, 입천장에 닿지 않게해 발음해 보시라. 요 향긋한 음료를 손에 쥘 기회가 조금 더 높아질 지도 모른다.뭐 사실, 그냥 입아프게 반복할 필요 없이 손가락으로 짚는게 더 빠를 수도 있다. ^^



바젤은 학창시절 유럽 경제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을 라인강을 끼고 있는 도시인데, 스위스 북서쪽 끝에 있어서, 프랑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따라서 몇분만에 3개국을 찍고 오는 것이 가능하다. ^^ 실제로 오이군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장을 보러 치즈가 싼 독일을 갔다가, 고기값이 싼 프랑스에 들려 집에 오곤 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유로로 바뀌면서 전부 비싸져서 의미가 없지만.


※ 학창시절에 서독의 경제 부흥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그냥 경제 기적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건 순전히 한국에서만 쓰는 표현이라고 한다. 혹시나 해서 오이군에게 말해봤더니 안드로메다 언어를 들은 표정.



나는 바젤에 처음 방문했을 때 부터 무언가 마음에 쏙 들어 한번 살아 보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크기가 너무 크지도 않으면서도 도시의 편리함을 다 가지고 있고,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아서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급스러운 수공예품과 예술품, 아뜰리에등이 밀집해 있어 구경거리도 많고, 적당히 기품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활기찬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긴 독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라, 불어권에 사는 오이군에게는 거의 외국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나야 불어권이나 독어권이나 다 외국이라 상관 없지만, 오이군은 같은 나라임에도 본인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따라서 오이군에게 스위스 독어권 지역은 가끔 놀러가는 곳이지 삶의 터전으로 잡을 대상은 아니다.



동화속의 크리스마스

뜨거운 와인과 함께라면 겨울도 여름만큼 정렬적이다



바젤의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가는 길목, 이미 상점의 쇼윈도들이 한껏 기분을 살려준다. 독특하게 이집은 불난 듯 전부 빨간색으로 장식을 했네...밤에 혼자 보고 있으면 은근 무섭겠다 ^^;



▲ 어른이나 아이나 상점들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 진짜 정통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소나무들


이곳 저곳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데, 전부 진짜 나무이다. 원래 그 곳에 있는 나무는 아니고, 크리스마스때 마다 이 크고 멋진 나무들이 산에서 베어져 내려오는 참사를 당한다. 뭐 워낙 나무가 많고, 이를 위해 따로 재배되는 것이기는 한데, 살짝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시즌이 지나버리면 어느집의 불쏘시개로 사라질 운명. 

일반 가정집 트리도 마찬가지 이다. 작은 소나무를 화분에 하나 키우면 좋을 것을, 꼭 베어진 나무를 사 와서 한두달 장식을 하고, 바싹 마르면 벽난로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지게 한다. 내가 보다 못해 어느 해는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짜 나무를 사왔더니, 가족과 친구들이 화들짝 놀라더라.

헉, 아니...가짜 크리스마스 같잖아. 잘 만들긴 했는데, 뭔가 이상해...이런건 상점 쇼윈도 장식용 아니니?

음, 나는 스위스에 간 첫해 크리스마스에 오이군이 낑낑대고 짊어지고 온 진짜 나무에 저런 반응을 보였는데, 이들은 가짜 나무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 건물 자체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바젤 시청



▲ 가짜 나무는 이런 곳이나?


드디어 크리스마스 마켓에 도착했다. 멀리서도 화려하게 빛나는 간이 상점들이 추운 겨울에도 발걸음을 절로 가볍게 한다. 이미 우리 입에서는 징글벨이 흘러 나오고, 심장은 콩닥 콩닥 박자를 맞춘다.



시장에서 파는 것 중에 크리스마스 장식품도 있는데, 이것도 전부 진짜 나뭇가지와 나무 열매이다. 뭐 가지와 열매는 내년에 또 자랄테니, 만들 때 공해를 가중시키는 플라스틱 장식품 보다 훨 나은 것 같다.



오이와 감자가 매번 가장 많은 시간 넋을 놓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유리 공 장식 만드는 집이다. 아저씨가 유리를 달궈 입으로 불어서 모양을 만든 다음, 식혀서 핸드 드릴로 직접 표면에 무늬를 새겨 넣어주는 것까지 시연을 해 주신다. 빨갛고 파란 메탈 코팅을 하는 것도 있지만, 이런 투명한 하얀 것들이 제일 이쁜 듯. 그러나 개당 가격이 꽤 해서 나무 하나를 다 장식하고나면 연말에 파산하겠더라.


유리 공의 아픈 추억 : 스위스에 간 첫해, 오이군과 집에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면서 나무에 매다는 반짝이는 방울들이 전부 유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나는 한국에서 흔히 쓰는 메탈 코팅 된 플라스틱인 줄 알고, 방울 하나를 좀 세게 내려 놨는데, 박살이 나며 깨지는게 아닌가. 어릴 적 부터 갖고 있던 추억의 물건인가본데, 깨먹어서 오이군에게 거의 상욕 먹을 뻔. -_-; 그 뒤로 상점이나 친구들 집의 크리스마스 장식용 유리공을 유심히 봤는데, 대부분 얇은 유리에 코팅을 해 놓은 제품이었다. 스위스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은 장난이 아니다. 나무도 진짜 나무, 방울도 섬세한 유리공, 장식도 진짜 열매. 뭐 물론 대형마트나 다이소 비슷한 잡화점에선 플라스틱 코팅공을 팔긴 파는데, 나 같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듯.




▲ 라클레트 치즈 녹이는 기계들


무엇보다 시장이 즐거운 이유는 먹거리가 있기 때문 아닌가. 곳곳에 다양한 동화같은 건물들이 세워지고, 라클레트, 절반 자른 바케트에 구멍을 뚫고 퐁듀치즈를 부어주는 약식 퐁듀, 소세지, 크레페, 와플, 핫도그 등등 다양한 먹거리로 추위를 달래준다.


라클레트 : 삶은 감자위에 녹인 치즈를 부어 먹는 스위스 전통 음식. 오이, 양파, 새끼 옥수수 피클 등을 잘게 잘라 같이 버무려 먹는다. 가끔 베이컨을 구워 같이 먹기도 하는데, 정통 방식은 아니다. 기본은 감자와 치즈 인데, 한국에 있는 스위스 음식점엘 갔더니 메인인 삶은 감자를 안주더라. -_-; 비싼 진짜 라클레트 치즈대신 밍밍한 모짜렐라 종류가 나와서 아쉽지만, 이해하고 넘어가 주기로 했는데, 메인인 감자대신 야채와 고기 몇첨이 나온 건 좀 커다란 충격. 오이군은 마치 우리가 해외에서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는데, 밥대신 김치와 콩을 볶아줄 때 느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테지. 결국 식사 도구만 라클레트였던 음식을 먹고, 오이군은 고향생각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집에 와야 했다는 슬픈 이야기. 

라클레트의 기본 세팅은 삶은 감자와 라클레트 치즈라구욧! (오이군의 외침)




바젤은 크리스마스 마켓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도시이다.



▲ 꽁꽁 언 바젤의 팅겔리 분수


겨울에도 멈추지 않는 팅겔리 분수. 다양한 메카닉을 이용해 기계와 물줄기가 움직이는 예술 분수라 유명한데, 겨울에도 멈추지 않고 물이 나온다. 고드름 때문에 더이상 기계들은 움직 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자체로 또 멋진 예술 작품이 되었다.



▲ 원래는 이런 모습



짜잔. 우리가 크리스마스 마켓을 죽어라 쫓아다니는 진장한 이유, 뜨거운 와인이 등장했다.

Gluhwein 이란 이름이 보이자 마자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져 나오는 오이군, 입에서 불을 뿜는 감자. ^^

뭐 집에서 만들어 마셔도 되지만, 뱅쇼는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마셔야 제맛이지. 스위스에서는 맥주와 와인을 만 16세부터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마켓에 가면 가족들이 옹기 종기 모여 뱅쇼를 들고 마시는 것을 볼 수 있다. 



▲ 음주 산타


쌀쌀한 날, 밖에서 마시는 술이라 안취할 것 같지만, 뜨뜻하게 데워놔서 인지 술 좀 한다하는 사람도 저거 한잔이면 헤벌레 기분이 좋아진다. 맛있다고 두잔 세잔 마셨다간 한겨울에 길에서 야영하는 수가 생기니 조심하시길 ^^

뱅쇼는 크리스마스 마켓 뿐만 아니라 스키장에서도 인기있는 음료다. 또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교회에 갔다 나오면 입구에서 한잔씩 나눠준다. 뜨끈한 뱅쇼를 한잔 들고, 크리스마스 성가곡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교회 앞에서 사람들과 모여 두런 두런 담소를 나누며 느끼는 소소한 행복.

그냥 무조건 싫다고만 생각했던 스위스에 어느새 이런 작은 행복들이 곳곳에 묻어 있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오늘도 나는 평범하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지금 이 순간에 언젠가 아련히 그리워 할지도 모르는 작은 추억을 만들고 있는 거겠지.

12월이면 스위스가 그리운 이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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